巨人의 탄생 이승만 박사는 1875년 3월26일 북한 황해도 평산군 능내동에서 조선 왕실의 후예 양녕대군(세종대왕의 큰 형님, 태종대왕의 맏아들) 16대 손으로 빈한한 선비집안인 이경선 옹의 6대 독자로 탄생하였다. 어머니 김씨가 이승만의 나이 두살 때 이승만을 잘 교육 시키고 훌륭히 성장 시키기 위해 한성(지금의 서울)으로 이주하여 지금의 동작동 지덕사(양녕대군 사당)옆에서 살며 비가 오지 않아 가물 때 기우제를 지내던 우수현의 우자와 남녘 南자를 따 호를 우남이라 지어 주었고 그의 어머니 김씨는 이승만을 18세까지 가정과 서당에서 철저한 유교적 정신교육과 한학을 가르쳤다. 그럼으로 해서 이승만은 서예와 한학에도 통달했다.
<아버지 경성공, 오른쪽이 18세 이승만,1893년>
이승만의 교육 1895년 이승만이 만 19세가 되던 해 서울의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2년 동안 서재필박사와 배재학당 설립자인 아펜젤러(Appenzeller)) 등 빼어난 교사들에 의해 영어교육과 신학문을 접하게 되면서 서구의 민주적 정치사상에 눈 뜨게 된다.
<이승만이 편집을 맡았던 협성회보, 창간호 1898>
당시 구한말 봉건사회를 반대하는 사회개혁운동을 하다 1899년 한성감옥에 투옥되어 5년 동안 죽을 운명에 처했으나 민영환 선생의 도움으로 출옥하였다.
<이승만의 옥중 사진, 왼쪽이 이승만 1903년>
1905년에는 미국으로 유학하여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국제법학 학사학위, 하버드대학에서 국제정치학 석사학위, 프린스턴 대학에선 종교철학 석사학위와 1910년 동대학 철학박사 학위를 받아 5년 반 동안에 초 일류대학에서 석사학위 3개와 박사학위 1개를 받는 진기록을 수립하기도 하였다.
<이승만의 학위증>
이승만의 독립운동
1910년 이승만은 한국으로 귀국하여 YMCA 학감직을 맡아 기독교 청년운동과 교육에 전념하다 서재필 박사와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가 체포하려 하자 또다시 미국으로 탈출하여 1913년 하와이로 정식망명하게 된다.
<이승만이 창간한 신문, 광무2년>
<한국 최초의 일간지>
이승만은 그당시 하와이에 거주하던 조선인 동포 5,000 여 명을 단합시키기 위해 제일 먼저 민족학교를 세우고 한인기독교회를 창립하였다.
1939년까지 하와이 호놀룰루를 근거지로 교육자 내지 준교역자로서 한인동포지도자 역할을 할 때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한국에서 3.1운동이 터지자 일약 해외 한국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1919년3월29일 블라디보스톡에 수립된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으로 같은 해 4월23일 서울에서 선포된 임시정부의 집정관 총재로, 그리고 1919년 9월 6일 상해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으로 추대되어 중국 상해를 방문하였다.
당시 일제가 이승만을 체포하기 위해 30만 달러 거액의 현상금을 걸어 일본의 체포를 모면하기 위해 완전 중국인 복장으로 위장하여 하와이행 화물선 갑판 밑창 시체실 관옆에서 20 여일을 견디며 하와이에 돌아온 후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의 심한 분열상에 환멸을 느끼며 1939년 그의 정치무대를 하와이에서 워싱턴 DC로 옮기게 된다.
<임정 시절 중국인 복장을 한 이승만,1921>
1919년부터 1925년까지 워싱턴 DC에 구미위원부(Korean-Commission to America &;Europe)를 설치하고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다 미국 및 유럽 국가들의 정계를 누비며 수많은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다.
<이승만이 1904년 옥중에서 탈고,1910년 LA에서 출판>
1942년엔 미국정계를 깊숙히 파고들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과 해방을 절규하며 일본이 미국을 공격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밀고하자 미친 사람 취급당하며 문전박대를 당하자 일본 내막기 (Japan Inside Out)라는 책을 영문으로 발간하여 1942년 7월에 미국 정계에 뿌렸는데 이승만의 예언이 적중하여 갈은 해 12월에 일본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미국이 이승만에 대해 깜짝 놀랐다. 드디어 미.일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이승만은 이 기회에 미국정부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어내는 외교활동에 전력하다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하여 일본이 항복하고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해방되었다.
<뉴욕에서 발간한 이승만의 영문 저서 일본 내막기, 1941>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과 반탁운동 1946년 10월16일에 서울로 돌아온 이승만은 조선독립촉성 중앙협의회를 조직하여 반탁운동을 벌리던 중 1947년2월14일에 미국 군정청의 최고 자문기구인 남조선 대한민국 대표 민주의원 의장으로 선출되어 중앙방송을 통하여 모범적 독립국가 건설과 과도정부 당면정책 33항 이라는 연설문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그가 40년의 해외독립투쟁과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여 최초로 밝힌 ‘신국가 건설’의 청사진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1948년5월10일 총선거를 실시하여 제헌국회가 구성되자 이승만은 제헌국회 의장에 당선되어 헌법 제정을 총괄하는 책임을 맡아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심의 및 채택에 중요한 역할을 행사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했다. 1948년7월에 이승만은 국회의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는데 그당시 득표율은 이승만 82%, 김구 18% 였다. 이승만은 1948년7월24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취임 및 같은해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에서 개회사를 하였다.
<대통령직 수임서에 서명하는 이승만,1948>
한국적 기독교 국가 건설 이승만은 원래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유교적 교양을 체질화 하였으나 배재학당에서 수학하고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조선독립 투쟁을 하는 동안 1899년에 기독교에 귀의한 이래 한국에서 기독교 교육 내지 선교활동을 했고 敬天愛人사상을 좌우명으로 받들고 생활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미국 윌슨 대통령이 한국민의 독립열망을 묵살해 버리자 이승만은 미국과 미국교회에 크게 실망은 했으나 한국을 기독교 국가로 건국하는데는 변함이 없었던 나머지 다음과 같이 대 미국에의 호소문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1919년4월14일 우리의 대의 명분은 하느님과 인간의 법 앞에서 당당한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우리 민족을 일본의 군국주의적 전제로부터 해방 시키는 것이며 아시아에 민주주의를 부식하는 것이다. 우리의 희망은 기독교를 보급시키는 것임으로 우리는 우리의 호소가 미국국민의 지지를 받을만 하다고 확신하는 바이다.” 1948년5월31일 임시국회 의장으로서 제1대 국회(제헌국회)를 개원하기에 앞서 이윤영 의원에게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부탁했고 동년 7월24일 대통령 취임식에서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선서를 하였다.
<대통령 취임연설을 하는 이승만,1948 7 24 >
본내 이승만의 꿈은 대한민국을 완전한 서구식 기독교 국가로 건국하려 하였으나 1912년 중국의 신해혁명의 여파를 볼 때 한국에서 완전한 서구식 기독교 국가 건설은 시기 상조라 판단한 나머지 유교 및 전통 종교들의 장점을 포섭한 한국적인 기독교 국가로 이념을 바꾼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민주공화제 정부수립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1949년 8월 15일 정부 수립1주년 기념행사에서 신생 대한민국을 가리켜 4천여년 유래된 정치사상과 신세계의 새정치주의를 합류시켜 만든 모범적 정체라고 역설하였다. 이승만은 부강 문명 달성의 필수요건인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하는 정치제도는 민주공화제뿐이라고 역설하였다. 또 민주공화제를 상고시대 동양에서 시도하다 실패한 제도이며 현재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양 부강국에서 활용하는 제도로 파악하였던 것이다. 1914년 세계1차 전쟁이 민주주의 연합국이 군국주의 독일을 제패하고 승리한 사실을 민주주의 개가로 받아들여 앞으로 민주공화제가 전세계적으로 보편화 될 것을 확신한 앞을 볼 줄아는 예리한 그의 예견은 가히 선견지명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은 새로 출범된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정부이며 모든 국민이 평등권과 언론, 출판, 종교, 집회 등 모든 생활분야의 자유권을 누려야 된다고 역설하고 1948년 7월에 공포하여 발효된 대한민국의 헌법에 이승만이 제헌국회 의장으로서 그의 이상이 수록되었다.
반공보루의 구축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이승만의 이러한 반공의식은 미국에서의 유학 및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체질화 되었으며 1917년 볼세비키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 왕조가 무너지고 공산정부가 들어서며 반공의식은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소련이 동유럽 약소국가들을 침탈하여 첩병하자 그리고 중국에서 공산당과 국민당 간에 내전이 전개되자 공산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한층 더 높였다.
광복후 좌,우익 간의 갈등이 날로 심화되어 공산당과의 대결이 불가피해지자 이승만은 1945년 12월19일 드디어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 이란 방송연설을 통해 한국은 지금 상황에서 공산당원을 원치 않는 것을 세계 각국에 대하여 선언한다.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공산주의자들이 제 나라나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설파하였다.
<자유중국을 방문해 장개석총통과 만나는 이승만,1953>
이승만은 1949년 5월에 민족내 계급간 알력을 조장하고 계급투쟁을 선동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공산주의에 대항할 一民主義라는 자신의 정치 이념을 제창하여 결국 대한민국의 국시가 되었다.
평등사회의 실현 광복후 이승만은 ‘모범적 독립국을 건설하자’ 라는 방송연설에서 독립국의 건설은 민중의 빈부귀천 남여간의 평등이라고 부르짖었다. 이승만의 이러한 평등주의 이상은 그 후 대한민국 헌법에 국민의 평등권 부분에서 모든 국민은 법률 앞에 평등하며 성별 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라는 조문으로 법제화 하였다.
문명부강의 달성 광복후 이승만은 과도정부 당면 33항을 선언하여 국민교육진흥 정책을 수립하고 의무교육령을 발하여 전국민의 교육수준 창달을 꾀하였다. 1946년 5월 26일 돈암장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조선의 부강대책에 대한 담화를 통해서 자신의 경제개발 계획을 밝혀 한정된 토지에 고착하여서는 격증될 국민의 경제생활을 건전케 할 수 없음으로 국내에 잠겨있는 모든 자원을 개발하여 국제무역권에 참가하고 농업과 상업이 병행하는 경제계획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국에 임하여 사유재산을 보호하고 자유경쟁을 조장하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체제를 이상으로 삼아 상공업을 육성시킴으로서 나라의 부강을 조속히 달성시키려는 경제 발전계획을 수립하기도 하였다. 1954년 이승만박사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당시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의 국빈초청을 받아 6.25 전쟁시 미국과 미국민의 성원에 감사하기 위해 미합중국 을 방문하여 7월 28일 미국의회 상하양원 합동회의에서 명연설을 하여 열렬한 기립박수를 포합해 33번의 박수를 받는 기록을 남겼다.
<미국 상하원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1954>
또한 뉴욕시민들의 환영대회 때는 이승만의 CAR PARADE 에 수백만 뉴욕시민이 거리로 뛰쳐나와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뉴욕에서 퍼레이드 및 만찬식의 이승만, 1954>
6.25사변과 이승만 그리고 맥아더 장군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은 전군에 휴가령이 내려진 이른 아침을 틈타 공산괴뢰 김일성이 남침을 감행한 것이 6.25 동족 살상의 전쟁이다.
<서울을 탈환하여 중앙청에 태극기 게양, 1950.9.28>
삽시간에 경상북도 대구까지 후퇴했던 대한민국 국군은 1950년 9월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같은 해 9월 28일 서울 중앙청에 태극기를 계양하며 맥아더 장군은 쓰고 있던 철모를 벗어 가슴에 얹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청하며 주기도문을 외우던 맥아더 장군! 이승만 대통령의 간곡한 제의로 계속 북진하다 압록강에 이르러선 쓰고 있던 철모를 벗어 압록강 물을 가득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바치던 맥아더 장군의 그 감격스러운 장면을 우리는 역사속에 영원한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드디어 평양에 입성하여서는 군령을 어기고 중국 본토에 폭격을 감행하려다 세계3차 전쟁을 우려하던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 의해 함상에서 해임 당한 후 1.4후퇴 후 휴전협정에 의해 3.8선이 그어졌으며 조국이 분단되었다.
<평양에 입성한 이승만을 환영하는 시민, 1950>
맥아더 장군은 해임 당한 후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 The Old Soldier never die just feud away 라는 명언을 남기고 뉴욕 아돌프 호텔에 기거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5.16구테타 성공후 미국 케네디 정부가 인정을 하지 않자 한국의 김종오 대장을 특사로 보내 국빈으로 초청하였으나 장군은 나를 초청하지 말고 하와이에 계신 Dr.Rhee(이승만박사)를 조국으로 모셔가라는 말을 남기고 끝내 한국 오기를 거부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하야 1960년 자유당 정권이 이승만 대통령이 모르는 사이 부패하기 시작하여 드디어 4.19가 터지게 되자 경무대엔 미국 매카나기 대사, 국방장관, 비서실장 등이 차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중앙청 앞에서 쏴대는 총소리를 들은 대통령이 미국 매카나기 대사에게 “이게 무슨 소리야?” 물으니 “각하, 데모하는 학생을 경찰이 쏴 수명이 죽었습니다.” 하니까 국방부 장관이 “각하, 이 데모대는 약간의 피를 보면 금시 진압할 수 있으니 작전명을 내려주십시요.” 하는 국방부 장관에게 “내가 국민이 원해서 대통령을 했는데 이제 국민이 원하질 않는 것 같으니 내가 물러나면 돼. 피를 보면 안돼. 부정을 보고 항거하지 못하는 국민은 죽은 국민이야.” 하며 하야 성명에 사인한 후 경무대를 떠나자 “각하, 이 경무대를 지키십시요.” 라 말하던 매카나기 미대사에게 “너의 아이크 보고 와서 지키라고 하지, 왜 날보고 지키라고 해?” 핀잔하며 경무대를 걸어서 나오자 경호실장이 차를 대기시켜 “각하, 걸어서 가시면 절대 위험하십니다.” 라 경고하던 경호실장을 향해 “나는 내 발로 걸어서 이화장까지 갈거야.” 하며 걸어서 중앙청 부근에 이르자 돌을 던지며 데모하던 군중들도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게 했던 당당했던 애국자! 건국대통령의 물러날줄 알았던 용단은 오랜 미국생활에서 체질화 된 人愛주의자이었음은 분명하다.
<경무대를 떠나는 이승만,1960>
이화장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그 이튿날 아침 일찍 이웃주민들이 이화장 담 너머로 기웃거리자 그 주민들을 향해 “나 이제 대통령이 아니고 한가하니 놀러들 오시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던 자신있는 애국자라 평하고 싶다.
<하야 후 이화장의 이승만, 1960>
건국대통령의 서거 1960년 망명이 아닌 한 3개월간 휴양차 하와이를 찾은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여행용 가방 4개에 인삼 몇 봉지와 선물 받은 금수저 한벌이 전재산으로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프란체스카 여사와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 1960>
이승만 박사는 하와이 교포 최씨 집에 기거하며 “돈 아껴쓰라, 돈 떨어지면 한국 못가.” 하며 이인수 양아들을 독려하던 애국자!
<하와이 시절 병상의 이승만, 1962>
이동원 외무부 장관이 개인 자격으로 병문안차 방문했을 땐 이미 기력이 소진되어 무슨 말인가 하려고 애를 쓰지만 목만 덜컥 덜컥하고 양눈에서 눈물만 주르르 흘리시던 상황을 이동원 외무부 장관이 국무회의에 보고하는 순간 1965년 7월19일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께서는 승하하셨고 하와이 미 정부에서는 이날을 공휴일로 선포하였으며 건국대통령의 유해가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장례식에는 전국에서 수백만의 인파가 모여 애도하던 장례식은 강제 동원이 아닌 건국의 어버이 애국자에게 보내는 민심(民心) 그대로 였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그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국립묘지에 영민하고 계시다.
<이승만의 장례 행렬, 1965>
총평 우남 이승만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 동안 집권하며 영욕이 점철된 국가 통치의 궤적을 남겼다. 이승만은 여러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외교 독립노선을 유달리 추구했던 외교 내지 정치가로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세계적 정치지도자였다.
물론 이승만 대통령의 실정도 인정되나 실정보다는 그의 위대한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그의 전생을 마감했고 1940년내 자본주의 민주국가를 건국했다는 위대함과 90평생을 조국의 해방과 건국에 바친 그의 애국 애족 정신은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1950년대 국민 문맹율이 78%에 육박하던 문맹율을 국민교육진흥정책을 펴 1960년대 국민문맹율을 5% 이하로 줄이며 자본주의 민주정부를 수립하여 한미동맹의 바탕 위에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대한민국이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체제로 남아 있을 수 있었고 즉 오늘의 자유와 번영된 조국의 근원은 이승만 건국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그가 아니었던들 오늘의 대한민국은 고작 베트남이나 북한 같은 처지밖에 되지 못했을 것이다. 1945년에 북한에는 이미 스탈린에 의해 공산정권이 수립되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정의의 이 대하를 향해 도도히 흘러 머지 않아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위대한 업적이 재평가 되어 조국 대한민국에 건국대통령의 기념관이 우뚝 서고 건국 대통령 탄신일이 국경일로 선포되며 대한민국 국부로 재평가 될 날이 머지 않았다. 끝으로 잔악무도한 일본 땅에 불벼락이 떨어질거라는 1944년 선견지명의 하와이 발언과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외쳐대던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사진을 소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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