굄돌 책 보러가기
"○○! 나? 부천에 왔지. ○○은 어디 갈 건데?"
가만 들어보니 엄마인 것 같은데 '○○'이라며 이름을 부른다. 설마. 설마 그러겠어? 라며 도리질했지만
통화 내용으로 보아 엄마가 분명했다. 그런데 왜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부르는 걸까? '○○씨' 도
아니고 애칭이나 별칭도 아닌 것 같고. 궁금했지만 함께 공부하는 아이들이 있어 좀 참았다가 어느 정도
아이들이 빠진 다음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가서 물었다.
"아까 누구랑 통화한 거야?"
"우리 엄마요. 엄마 이름이 ○○이예요."
"그런데 넌 엄마라고 하지 않고 이름을 부르던데?"
"원래 그래요. 우리 언니도 그러는데요?"
당황스럽다. 엄마에게 이름을 부르는 것도 그렇지만 그걸 노골적으로 지적했는데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의연함이라니! 이게 무슨 경우인가? 대체 왜 그러는 걸까? 그런데 한 수 더 뜬다.
"엄마한테 욕도 해요."
민선이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2년 남짓 우리 집에 와서 공부하다가 멀리 전학가는 바람에 인연이 끊
겼었다. 다니는 동안 유난히 나를 힘들게 했던지라 잊을 순 없지만 4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다 보니 그 아
이가 지금 몇 학년일까, 싶을 만큼 가물가물했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아이를 상담했던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도무지 선도가 힘든 아이가 있는데 내게 맡기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 싶어 슬쩍 말을 비췄
더니 예전에 자신을 가르쳤던 선생님이라며 무척 반가워하더란다.
그렇게 민선이는 우리 집에 다시 왔다. 현관문을 밀고 들어선 민선이의 얼굴이 활짝 핀 해바라기처럼
환하다. 반쯤은 반말을 하다가 반쯤은 투정을 부리다가. 이 아이를 데리고 어찌 공부할까 싶어 걱정이
태산인데 따로 얘기를 나눌만한 형편이 아니다. 초등학교 4학년 정도의 아이들이 읽는 책 한 권을 들
려주고 시간을 벌어보려고 했지만 이렇게 어려운 책을 주면 어떻게 하냐며 엄살을 부린다. 그러더니
한 시간 반 동안 몇 장도 넘기지 못하고 몸을 비틀어대다가 스마트폰 삼매경에 푹 빠져 계신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돌아갔을 때 민선이와 마주 앉았다. 왜 엄마를 엄마라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부르
는지, 4년 동안 어떻게 보냈는지 등 궁금했던 것들을 물었다. 자기 입으로 '놀만큼 놀았다'고 했으니
그동안 얼마나 엄마 속을 썩였는지는 묻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처럼 황망한 말을 스스럼
없이 한다.
"엄마한테 욕도 해요."
깜짝이나 놀라 되물었다.
"엄마가 가만 둬?"
"예."
"언제부터 그랬는데?"
"초등학교 때부터요. 3학년 때부터 그랬어요. 욕만 한 게 아니예요. 엄마에게 온갖 못된 짓 다했어요."
어찌하여 그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욕지거리를 하게 되었는지, 왜 그걸 바로잡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
렀는지 궁금했다.
"아빠가 그랬어요. 아빠는 입만 열면 엄마에게 욕을 했어요. 나도 아빠한테 배웠어요."
민선이 부모는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 늘 싸웠고 민선이는 엄마 혼자 서럽게 우는 걸 수도 없이
봐 왔다. 민선이는 엄마 아빠가 왜 그렇게 살아야 했는지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도 다 꿰고 있었다. 그
만큼 갈등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무능력하고 불성실한 가장이었던 아빠는 생활전면에 나서지 않고 늘 엄마 등에 기대 어영부영 살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남자로서의 자존심은 남아 아내가 조금만 자극해도 참질 못하고 길길이 뛰며 분개
했다. 열등감 때문이었는지 세상에 대한 분노심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민선이 아빠는 내면에 가득
차 있는 화를 민선이 엄마에게 푼 것이다. 입이 시궁창(민선이 표현)이었던 아빠는 화가 나면 온갖 상
스런 욕을 하며 엄마를 괴롭혔다. 민선이 아빠는 민선이에게 교과서였다. 민선이는 아빠가 하는 것처
럼 엄마에게 막말을 하거나 거칠게 대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욕설과 거친 행동을 일상적
으로 하다보니 이력이 난 것이다.
망나니처럼 사는 남편에게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민선이 엄마는 두 딸에게 올인했다. 딸들이 원하는
거나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뭐든 다 해줬다. 대충 대화를 정리할 때가 되었다 싶을 때, 민선이는 매
우 중요한 말을 놓쳤다는 듯 황급히 한 마디를 덧붙인다.
"제가 이렇게 된 건 아빠 영향도 크지만 엄마가 우릴 너무 오냐오냐해서 키워서 그래요. 엄마는 우리
가 무슨 잘못을 하거나 나쁜 짓을 해도 혼내지 않고 다 받아줬어요."
민선이는 이와 같은 엄마의 무분별한 용납을 '오냐오냐'라는 말에 담아 표현했고 자신이 비뚫어지게
된 두번 째 원인으로 꼽았다.
공부에 주력했던 민선이 엄마는 아이들의 인성교육이나 인간으로서의 기본 소양을 닦는 일에는 소홀
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예의없이 굴거나 배려심이 없어도, 사회성이 떨어지는 것에도 크게 마음
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더 이상 민선이를 조정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을 즈음 민선이 엄마는 민선이 의향과는 전혀 상관없
이 아이를 미국으로 보내버렸다. 함께 어울려 다니는 친구들과 떼어놓기 위함이었다. 엄마와 분리된
민선이는 제멋대로 살면서 1년을 보냈다.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건실하게 생활하지도 않았다. 다
시 한국으로 돌아온 민선이의 삶은 여전히 무질서했고 지칠 대로 지친 민선이 엄마는 자신의 딸을 놔
버렸다. 아이를 포기한 것이다.
"새벽 5시에 들어와도 아무 말 안 해요. 어디 갔다 왔냐고도 묻지 않아요."
그런데 정말 원없이 놀았기 때문일까. 이젠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더란다. (우리집
에 오게 된 이유이다. 책을 읽다보면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한다. 1년을 유급했지만 민선이
는 현재 갈 수 있는 고등학교가 없는 모양이다. 워낙 출석상황도 좋지 않고 성적은 바닥이고.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로 가야 할 것 같다는 말을 열 번쯤 했다.)
민선이가 공부에 매진하게 되고 성실한 학생이 된다면 변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자존감이 높아지면
그처럼 천박한 말과 행동들을 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빠한테 배웠어요"
"엄마가 우릴 너무 오냐오냐하며 키워서 그래요"
자식을 키우는 부모라면 민선이가 했던 이 두 마디를 허투루 흘려 보내면 안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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