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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오릉박씨종친회 금산군지부 정기모임

by 박인군 2015. 7. 13.

 

 

신라오릉박씨종친회 금산군지부 정기모임 

 

 

박씨 대종친회 금산지부 7월 정기모임이 진산면 부암리 약수가든에서 있었다.

가뭄이 해갈되는 반가운 비가 내리는 가운데 마침 초복을 앞두고

 보양식으로 삼계탕과 건강음식을 들면서 즐거운 모임을 가졌습니다.

박금주금산군지부장을 비롯해서 30여명의 운영위원이 이번 달 종친회를 함께하고 있습니다.

 

 

 

 

 

 

 

 

 

 

 

 

 

 

 

 

 

 

전(全) 박씨의 시조. 휘 혁거세. 왕호(王號) 거서간(居西干). 비(妃)는 알영부인(閼英夫人). 《삼국사기》에 따르면, 일찍이 고조선의 유민(遺民)이 지금의 경상도 지방 산곡간(山谷間)에 흩어져 살면서, 양산촌(楊山村) 고허촌(高墟村) 진지촌(珍支村) 대수촌(大樹村) 가리촌(加利村) 고야촌(高耶村) 등 여섯 마을을 형성하였다. 고허촌장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 곁에서 말이 알려준 큰 알을 얻었는데, 깨 보니 그 속에 어린아이가 있었다. 알이 매우 커서 박과 같다 하여 성을 박(朴)이라 하였다.
그가 13세가 되었을 때 매우 영특하여, 여섯 마을의 왕으로 삼고 국호를 서나벌(徐那伐)이라 하였다. BC 53년 1월 용(龍)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나 계집아이를 낳았는데, 우물 이름을 따라서 알영이라 하였다. 알영은 자랄수록 덕기(德氣)가 있으므로, 혁거세가 그녀를 비로 맞이하여 알영부인(閼英夫人)이라 하였다. BC 41년 혁거세가 알영부인을 동반, 6부(部)를 순행하면서 백성에게 농잠(農蠶)을 권면하여 생산의 증가에 힘쓰니, 백성들이 이들을 이성(二聖)이라 칭송하였다.
BC 37년 서울에 금성(金城)을 쌓고, BC 32년 금성에 궁궐을 지었다. 기원전 28년 낙랑이 쳐들어왔으나 국경에 있는백성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고, 들에 곡식더마가 즐비한 것을 보고 '도덕의 나라'라고 여기고 스스로 물러갔다.
4년 61세로 죽자 담엄사(曇嚴寺) 북쪽의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는데, 지금 위치는 경주시 남천(南川)의 남쪽이다.
※ 우리나라 전(全) 박씨(朴氏)을 일컬어 신라박씨라 함.

 

박씨(朴氏)의 선조는 신라 시조왕(始祖王) 혁거세(赫居世)에서 시작되었는데 신라가 이룩되기 전에 고조선(古朝鮮)의 유민(遺民)들이 동해 해변이나 산골에 흩어져 살아서 육촌(六村)을 이루었고 육촌(六村)에는 각각 촌장(村長)이 있었다.
첫째 촌은 알천(閼川)가의 양산촌(楊山村)인데 촌장(村長)은 이 알평(李 謁平)이고
둘째 촌은 돌산(突山 지금의 南山) 기슭의 고허촌(高墟村)인데 촌장은 최 소벌도리(崔 蘇伐都利)이며
셋째 촌은 무산(茂山) 기슭의 대수촌(大樹村)인데 촌장은 손 구례(孫 俱禮)요
넷째 촌은 취산(鷲山) 기슭의 진지촌(珍支村)인데 촌장은 정 지백호(鄭 智伯虎)이고
다섯째 촌은 금산 기슭의 가리촌인데 촌장은 배 지타(裵 祗陀)요
여섯째 촌은 명활산(明滑山) 기슭의 고야촌(高耶村)인데 촌장은 설 호진(薛 虎珍)이니 이를 진한 육부장(辰韓 六部長)이라고도 하고 혹은 하늘에서 내려온 여섯 조상이라고도 이른다.

그때에 육촌(六村)을 통솔할 임금이 없음을 걱정한 끝에 육촌장이 알천(閼川)에 모여서 사흘 동안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기도하였더니 단군기원 二二六五년(서기 전 六九·漢宣帝 地節 元年 壬子)에 고허 촌장 소벌 도리(蘇伐 都利)가 멀리 양산(楊山)을 바라보니 그 밑의 나정(羅井) 근처 숲사이에 오색이 영롱 서기가 뻗치고 용마(龍馬)가 큰 소리를 지르며 신선이 꿇어 앉아 절하는 모습이 보이는지라 즉시 쫓아가 보니 용마는 보이지 않고 한 포(胞)가 있는데 큰 알 같기도 하고 박 같기도 하였다.
소벌공(蘇伐公)이 신기하게 여겨 포(胞)를 깨어 본즉 사내아기(곧 시조왕)가 태어나니 풍채가 단정하고 아름다운지라 동천(東川)에 목욕시켜 들이니 온 몸에 광채가 나고 가까이 있던 새와 짐승들이 신인(神人)의 탄생을 축복하여 노래하고 춤을 추기로 육촌(六村)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받들어 길렀다.
진한(辰韓) 사람들의 말에 박에서 탄생했다 하여 朴으로 성(姓)을 삼고 혁혁(赫赫)한 광명을 이세상에 주시며 오래오래 살아주시기를 바라는 뜻에서 혁거세(赫居世)라 이름을 지어 들였다 한다.

열 세살에 키가 어른과 같이 숙성하시므로 육촌 사람들이 받들어서 임금으로 모시었으니 이때가 바로 단기(檀紀) 二二七七年(서기 전五七년·중국 漢帝 五鳳元年) 갑자(甲子) 사월(四月) 병진일(丙辰日)이었다.
왕호(王號)를 거서간(居西干 그때의 말로 존귀함을 이르는 뜻임)이라하고 나라 이름을 서라(徐羅)라고 하였다가 그 후에 신라(新羅)라고 고쳤다. (新은 德業日新이요 羅는 강羅四方이라는 뜻임)

상고해 본즉 시조왕(始祖王)은 곧 성모(聖母)가 낳으신 분이다. 그런고로 중국(中國) 문헌(文憲)에 선도산(仙桃山)의 성모(聖母)가 현인(賢人)을 낳아 나라를 창립(創立)했다는 말이 있고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사람에 의하여 태어나지 않음을 혹자는 상서롭지 않다고 하여 선유(先儒)들이 많이 의심했지만 장자(張子)가 이르되 천지(天地)가 개벽한 처음에는 사람이 없었다가 사람이 생겼으니 이는 곧 천지의 기운으로 생긴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했고 소씨(蘇氏)는 말하되 대체로 보통과 다른 물건은 천지 기운으로 되는 일이 많은 까닭에 그 나는 것이 혹 달라서 기린의 출생이 개나 양과는 다르고 교룡(蛟龍)의 출생이 어별(魚鼈)관느 다른 법인데 하물며 신인(神人)이 범인과 다른 것은 아무것도 괴이할 바가 아니라 했으니 이 말 들이 다 이치에 맞는다.

양산 나정(楊山 羅井)에 이 사실을 기록한 시조왕 탄강 비각(始祖王 誕降 碑閣)이 있어서 중수하여 지금까지 수호하고 있다.
목은 이 색(牧隱 李 穡)의 시(詩)에 계림(鷄林)의 하늘 표주박에서 태어난 朴씨 들이 뻗어나고 퍼져서 어찌나 혁혁한지고 라 했고 명(明)나라 태조고황제가 신라(新羅)라는 명제(命題)를 내려 짓되 옛날에 혁거세(赫居世)가 한(漢)나라 오봉 원년(五鳳 元年)에 나라를 창건하여 천년(千年)을 전해오며 동쪽 한 지방을 지켜오고 있더라 라고 했다.

 

우리의 시조인 박혁거세왕께서 탄강하신 곳이다.

오릉(五陵)에서 동남쪽을 바라보면 소나무 숲이 소복이 있는 가운데 조그만 비각(碑閣)이 있고 그 옆에 있는 우물이 나정(蘿井)이다. 나정은 신라의 시조(始祖)인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탄강전설(誕降傳說)이 깃든 곳이다.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B.C.66) 3월 초하룻날 6촌(村)의 촌장(村長)들이 각각 그들의 자제(子弟)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옆의 언덕에 올라 회합을 갖고 6촌을 다스릴 유덕(有德)한 인물을 선출하여 군주로 모시고 도읍(都邑)을 정하자고 결정하였다.

이 때 나정 근처에 서운(瑞雲)이 드리워져 있고 백마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백마는 사람을 보자 하늘로 올라갔으며 6촌의 사람들이 알을 쪼개어 보니 어린 사내아이가 있어 동천(東川)에서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어울려 춤추듯 놀고 천지가 진동하며 일월(日月)이 청명(淸明)해지므로 이에 세상을 밝게 한다고해서 혁거세라 이름하였다.

같은 날에 알영정(閼英井) 계룡(鷄龍)의 왼쪽 옆구리에서 태어난 계집아이 알영과 함께 짝지워 남산(南山) 서록(西麓)에 궁(宮)을 마련하여 놓고 봉양하여 두 성아(聖兒)가 13세 되던 해인 원봉(元鳳) 원년 갑자(甲子)(B.C.57)에 왕과 왕후로 삼고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로 하였다. 혁거세가 태어난 알이 마치 박처럼 생겼다고 하여 그의 성(姓)을 박(朴)으로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이곳에는 시조 유허비(始祖遺墟碑)가 있는데 높이 2.25m, 폭 45cm, 두께 21cm이다.

 

시조왕비(始祖王妃)의 탄생도 역시 보통과는 달라서 용(龍)이 알영정(閼英井) 우물 가에 나타나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나니 동내의 안노인이 신기하게 여겨 양육하고 우물 이름을 따서 알영(閼英)이라고 지었더니 자라서 훌륭한 덕을 갖추시고 왕비가 되시어 시조왕을 잘 보필 하시어 나라의 기초를 튼튼히 세우시니 백성들이 이성(二聖)이라고 일렀다.

권 근(權近)이 말하되 국가각 흥할 때는 반드시 내조의 미가 있게 마련이어서 하(夏)나라에는 도산(塗山)이 있었고, 상(商)나라에는 유신이 있었고, 주(周)나라에는 태사가 있어서 나라의 시초를 바로잡고 교화의 기초를 튼튼히 한 연유가 되었다. 알영씨(閼英氏)가 시조왕비(始祖王妃)의 자리에 앉게 되심을 신라 사람들이 찬미함은 그 높으신 덕이 국민들을 심복시킨 까닭이라 하겠다.

삼가 생각하건대 하늘이 신성(神聖)을 내리실 때 반드시 성비(聖妃)를 배필로 내리심은 이치에 당연한 일인지라. 알영씨가 용에서 탄생하여 시조왕에게 짝짓게 된 일도 하느님의 뜻인 심상치 않음이니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태사를 얻어서 그때 사람들이 시전(詩傳)의 관저장(關雎章)과 같은 노래를 불러 찬양했고 시조왕께서 알영씨를 얻음으로 국인(國人)이 이성(二聖)이라고 칭송하였으니 만물 화육(化育)의 기본과 만복(萬福)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한다.
그 까닭에 시전(詩傳)에 칡 덩굴처럼 뻗어나고 메뚜기처럼 퍼져나서 본손과 지손이 백대의 아름다움을 이루었다고 하는 말과 같이 우리 시조왕의 자손이 길이 길이 번창해가는 것도 역시 시조왕비 할머니의 성덕(聖德)으로 기초를 바로잡아 복을 후세에 내리심이 주(周)나라의 태사에 필적하다 하겠다.

 

신라 시조왕의 왕비께서 탄강하신 곳이다.

오릉 경내에는 박혁거세의 왕비로 알려진 알영(閼英)이 태어났다고 하는 우물 알영정(閼英井)이 있다. 알영정의 위치는 혁거세왕의 제향을 모시는 제전인 숭덕전(崇德殿) 내부에 있다.
시조왕께서 탄강하시던 그날에 알영정에서 계룡 한마리가 나타나더니 홀연 오른쪽 옆구리에서 한 여아를 탄생하고 용은 간곳이 없었다. 때마침 이 우물가에서 빨래하던 한 노구가 있어 북천에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빛나는 것을 보고 시조왕의 탄생과 영이함을 방불하기에 육부의 촌장들이 봉양하였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두 성아를 지금의 남산 옛 창림사 터에서 봉양하여 탄생 후 13년 만에 육부촌장들이 추대하여 신라 시조왕과 왕후로 삼았다고 전한다.

 

성모사는 어악의 선도산(해발 380m) 주봉의 높고 큰 바위 밑에 있으며 박혁거세의 모후인 선도성모를 모신 사당이며 천년의 웅지를 품었던 옛서라벌 들판을 감싸고 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라 제26대(진흥왕) 왕때 안흥사의 지혜라는 비구가 승려를 데리고 사당의 신령을 모신 자리 아래에서 황금 160냥을 캐었다고 하며 54대 경명왕께서는 매 사냥을 즐겨하여 직접 이곳에서 매를 날렸는데 공교롭게도 매가 돌아오지 않으므로 신모에게 기도하기를 매를 찾게되면 이 사당에 봉작을 하겠다 하였더니 얼마되지 않아 매가 날아와 탁자에 앉았다고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에는 후손 언수가 시조왕의 위패를 모시고 성모사에 파란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니 신령을 모신 성모사는 신이(神異)한 전설과 오랜 역사를 가진 사당임을 알 수 가 있다.

현재의 사당은 1974년 전참봉 박재호의 아들 성형 준형 형제의 특성으로 웅장하게 중창하였는데 오릉성역사업을 주관했던 박재원 상임이사의 노고가 많았다.

 

신라 시조왕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묘전이다. 남해왕 3(서기 6)년에 시조묘를 세우고 사시로 제사를 받들었고 친누이를 주제토록 하였다. 유리왕 원년(서기 24)에는 시조묘를 전배하고 죄인을 특사하는 것이 살례가 되었다. 신라 제21대왕인 소지왕 9(487)년에 지금의 나정 옆에 신궁을 세워 새로이 즉위하는 임금은 반드시 신궁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는데 신궁의 이름을 나을신궁이라고 하였다 한다.

이후 조선 세종 11(1429)년에 오릉 동편에 묘전을 창건하고 위전 오결을 하사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였으며 양민 여섯 집에 세금을 면제하여 수호하게 하고 나뭇꾼과 우마의 방목을 금지하고 춘추로 중월에 향축과 폐백을 내려 보내서 제사를 봉향하였다.

그러나 선조 25(1592)년 임진왜란 때 묘전이 불타버리고 위패만 서악의 선도산 성모사에 봉안하여 다행이 화를 면하였고, 그로부터 10년 후인 선조 35(1601)년에 묘우를 다시 세워 위패를 봉안하고 수호관을 두었다. 그뒤 18년 후인 1618년에 묘우를 중건하고 숙종 30(1704)년에 다시 중수하여 경종 3(1723)년에 비로서 후손으로 하여 참봉을 두어 수호하도록 하였는데 성손유생 91인으로 윤직하게 하였으며 이해(1723년) 7월 22일에 예조에서 묘호를 숭덕전으로 사액을 하였다. 그리고 영조 37(1761년)년 11월 2일에는 경주부윤 홍양한이 왕명을 받들어 위패에 왕(王) 자를 쓴 신라 시조왕의 묘전이다.
광무황제 즉위로 국호 및 연호를 고치고 새로이 축문을 내려 춘추대제때 상향축문으로 받들었으며, 건국 24(1971)년 8월 27일에 사적 172호로 지정되어 예손 박정희를 비롯하여 문중성손들과 합심협력하여 사상 유례가 없는 대성역을 이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고 매년 3월 춘분일에 춘분대제를 봉향하고 있다.

 

호남지방에 거주한 많은 후손들이 경주 숭덕전까지 참배하러 가는것이 원거리이고 더구나 당시 교통수단으로는 쉽지않아 호남에서도 산수가 아름답고 소강남으로 칭하는 이곳 순천 란봉(鸞鳳)산 기슭에 1930년 박씨 종중의 소요 건축비 헌납금으로 경주 숭덕전과 동격으로 종중 총회의 결의를 거쳐 숭성전(정전 동 서제)를 창건하여 매년 음 4월 초1일과 10월 초1일 호남지방 후손들의 참배로 시조대왕을 주벽으로 8대군을 동, 서 종행으로 봉안하여 춘추대제를 봉행하게 되었다. 그후, 1953년 경관이 수렴하고 전망이 명쾌한 현 위치인 순천시 조곡동 297-1번지 죽도봉 산록에 정전과 회덕문, 경승문, 동, 서제등을 297평
에 연건평 33평 규모로 이건하였으며 박씨 종중의 성금으로 위토답을 순천시 풍덕동에 2필지(1629평)을 매입하여 제형비(祭亨費)로 충당하고 수차례에 걸친 중수 또는 부분 보수등을 통하여 유지관리보수에 최선을 다하여 지금에 이르름.
신라오능보존회 순천지부 061-743-0822
지부장 : 박주봉 (019-650-0299,061-753-0822)
총 무 : 빅한기 (011-644-4093,061-755-9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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