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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늘의 뜻과 땅의 기운이 어우러진 금산여행

by 박인군 2011. 5. 14.

 

하늘의 뜻과

 땅의 기운(氣運)

 어우러진 금산여행(錦山旅行)

 

충청남도의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충청북도 영동군, 서쪽은 논산시 및 전라북도 완주군,

남쪽은 전라북도 무주군과 진안군, 북쪽은 대전광역시 및 충청북도 옥천군과 접하고 있다.

면적은 576.29㎢이고, 인구는 58,583명(2007년 기준)이다.

1읍 9면 249개 동리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금산읍 상리이다.

 

축제 - '신비의 건강여행' 이라는 주제로 매년 9월 중에

 강처사의 효행설화가 서려 있는 개삼터와 세계 최대의 인삼과 약초상이 밀집해 있는 인삼,

약초타운을 중심으로 금산 인삼축제가 열린다.

 금산에서만 볼 수 있는 대통령수상작인 금산좌도풍물굿, 물페기농요,

부녀자들만의 기우제풍습인 농바우끄시기놀이 등을 비롯하여

인삼의 신비가 서려있는 진악산 산신제, 개삼제 등과

금산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린 전국 최초의 환상적인 촛불잔치가 열려

 금산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특별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고려인삼의 종주지답게 인삼을 소재로 하는 인삼요리30선 코너,

 건강식품 코너 등이 펼쳐져 인삼 축제가 아니면

맛볼수 없는 넉넉한 먹을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볼거리, 먹을거리와 함께 인삼축제 장터에는

고려인삼 건강특별전이 열려 한방진맥과 건강, 미용코너 등도 선보인다.

관광객이 현지 인삼포에 가서 직접 인삼을 캐보고 구입할 수 있는 체험테마인 삼캐기여행,

 인삼깎기, 인삼짜기, 인삼사우나 등 직접 인삼과 접할 수 있는 관광객참여 체험코너 등을 통해

 인삼과 약초의 신비를 새롭게 체험할 수 있는 자리도 마련된다.

 

민속 - 주요 민속놀이로는

윷놀이, 널뛰기, 달맞이, 다리밟기, 닭잡기 놀이 그리고 좌도농악을 들 수 있는데,

 좌도 농악은 금산에서 순천에 이르기까지의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의 준령산악지대에서

 다분히 군악설에 의해 발상된 농악으로써 전라도, 영남, 경기 등지로 전파되어

 이들 농악과 협화를 이룬다.

 

동제 - 이 지역에서는 각 마을어귀에 있는 고목을 대상으로 동신제를 지냈는데,

 마을 어귀에 있는 고목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섬겨

 여기서 정월대보름에 제사를 지낸다.

 

현재의 금산군(錦山郡)이란 행정구역상의 명칭은 1914년 3월 1일부,

 폐합으로 옛 금산군(錦山郡)과 진산군(珍山郡)을 병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 금산군(錦山郡)은 백제시대에는 진내군(進乃郡)또는

 진내을군(進乃乙郡)이라 했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경덕왕때 진예군(進禮郡)이라 고치고

고려초에 진예현(進禮縣)으로 하였다가

1305년(고려 충렬왕때 31년)에 금주군(錦州郡)으로 승격시키고,

부리현(富利縣), 청거현(淸渠縣), 무풍현(茂豊縣), 진동현(珍同縣)의 5현을 소속시켜

 지금주사(知錦州事)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高麗史 57券) 1413년(조선 태종 13년) 이에 따라

 금주군(錦州郡)을 금산군(錦山郡)으로 개칭하여 조선말까지 이르렀다.

 

옛 진산군(珍山郡)은 백제시대에는 진동현(珍同縣)이였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황산군(黃山郡) 의 속현(屬縣)으로 하였다.

 

고려초에 옥계부(玉溪府)로 고쳤다가 1305(고려 충열왕 31년) 금주군(錦州郡)에 소속시켰다.

그후 1390년에 다시 고산현(高山縣)의 속현(屬縣)으로 한 것을

 조선에 와서 1393년(태조2년) 에 만인산(萬刃山:胎峰)에 태조의 태(胎)를 모신후

진주군(珍州郡)으로 승격시키고 지진주사(知珍州事) 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으며,

1413년(조선 태종 13년)에 이에 따라 진산군(珍山郡)으로 개칭하였다.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 (則令 第36號)에 13도 실시에 따라

충청남도 공주부(忠淸湳道 公州府)의 금산군과 진산군을 전라북도로 편입되었다가

서두에 기술한 바와같이 1914년 3월 1일 부, 폐합으로

진산군을 병합하여 현재의 금산군(錦山郡)이라 칭하고,

금산면(錦山面),금성면(錦城面),제원면(濟源面) 부리면(富利面), 군북면(郡北面),

 남일면(南一面), 남이면(南二面),진산면(珍山面),복수면(福壽面),

추부면(秋富面)의 10개면(面)으로 하였다가 1940년 11월 1일

부령 제221호(府令 第221號)에 금산면 (錦山面)이

금산읍(錦山邑)으로 승격되어 1읍 9면으로 되었다.

 

그후 1963년 1월1일 서울특별시, 도, 군, 구의 관할구역

 변경에 관한 법률(법률 제 1172호)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전라북도에서

 충청남도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광복 이후 행정구역의 변동상황을 살펴보면은

1953년 12월에 군북면 의회(郡北面 議會)의 의결에 의하여 내부리(內釜里)에 있는

 군북면사무소(郡北面事務所)를 현재의 위치인 두두리(杜斗里)로 신축이전 하였으며,

1962년 5월 27년 군조례(郡條例) 제28호에 따라 군북면 내부출장소 (郡北面內釜出張所)를 설치하였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大統領令) 제 6542호에 따라

복수면 용지리 (福壽面 龍池里)가 추부면(秋富面)에 편입되었다.

 

 중요 관광지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개삼터(開蔘터)

지금으로부터 1,500년전 강씨성을 가진 선비가

부친을 여의고 모친마저 병이들어 자리에 눕자 진악산 관음굴에서 정성을 들여

 모친의 쾌유를 빌던중 어느날 꿈속에서 산신령이 현몽하여 “관음봉 암벽에 가면

 빨간열매 3개 달린 풀이 있을 것이니 그 뿌리를 달여 드려라”는 계시가 있어

그곳을 찾아가니 과연 그러한 풀이 있어 뿌리를 캐어 달여 드리니 모친의 병환은 완쾌되었고,

그 씨앗은 지금의 남이면 성곡리 개안이 마을에 심어 재배하기 시작하니

 인위적으로는 처음 재배가 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그씨앗은 3개가 달리고 인삼의 모습이

사람의 형태와 비슷하다하여 “인삼”이라 불 리게 되었다고 한다.

 

1,500여년전에 최초로 성곡리 개삼터에 인삼을 심었는데

그 뜻을 기리기 위해 1983년 7월에 개삼각을 지었으며,

개삼각의 안에는 진악산 산신령이 강처사에게 인삼을 하사하는 그림이 있으며

개삼각 앞에는 강처사가 살던 고택을 재현해 놓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매년 금산인삼축제시 인삼을 처음 재배케 해준

 진악산 산신령과 한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인삼제전을 군민의 정성을 모아 올리고 있는데

 한국의 대표적인 축제로 자리매김하면서 세계인이 참여ㆍ

체험하는 축제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인삼고을에 자리잡은 '호국의 터전' 칠백의총(七百義塚) 

칠백의총은 임진왜란 당시

조헌 장군 등이 옥쇄한 3일 만에

 유생들에 의하여 시신이 수습되어 현재의 자리에 모셔지고,

 전쟁 후 선조가 조헌의 묘비와 전각 등을 세웠다.

한일합방 후 일본인들에 의하여 파괴되 것을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대 초 현재의 모습으로 조성했다

 

경내에는 묘소와 ‘종용사’라는 사당, 기념관, ‘칠백의사 순의 탑’ 등이 있다.

인삼고을에 자리잡은 '호국의 터전' 칠백의총 종용사ㆍ

순의비 등엔 임진왜란의 아픔 생생히

비단처럼 곱다는 금강 맑은 물줄기와 봄볕에 물들어가는 금남정맥 산줄기가 어우러지는

 산중의 고을 금산. 골마다 들판마다 인삼 내음 가득해 우리나라 제일의

인삼 고을로 불리는 금산의 정신적 지주는 옛 무덤인 칠백의총(사적 제105호)이다.

여기엔 임진왜란 때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린 조국을 지키다 산화한

조헌선생과 영규대사를 비롯한 700의병들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단아하게 꾸며진 경내에 들어서면

벚꽃과 목련 꽃망울 툭툭 터지는 봄 풍경이 반긴다.

 평화로운 봄 분위기가 한껏 감돌고 있지만,

 연곤평은 임진왜란 때 피 터지는 싸움을 벌였던 싸움터.

 무덤 옆의 ‘중봉 조헌선생 일군 순의비’가 400여년 전의

처절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옥천 시골집에 내려와있던 조헌선생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찌르면서 북상해 영규대사와 함께 청주성을 탈환했다.

한편 금산에는 왜장 고바야가와가 지휘하는 1만5000여명의 왜군이

 ‘조선의 곡창’인 호남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집결하고 있었다.

이들은 금산을 점령한 뒤 두 파로 나뉘어 호남 땅으로 진격해 전주에서 합류하기로 했지만,

곰티에서는 김제군수 정담의 완강한 저지를 받았고,

배티에서는 전라도 절제사 권율에게 큰 타격을 받았으나,

이후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다시 사기가 높아있었다.

 

조헌선생이 이끄는 의병들은 호남 진격을 위해 금산에 집결 중이던 왜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하지만, 합세하기로 한 관군이 도착하지 않은 가운데 조헌선생과

700의병들은 변변치 않은 무기로 결사대가 되어 최후의 한명까지 버티다

 결국 장렬히 전사하였던 것.

 

이 '중봉 조헌선생 일군 순의비'는 칠백의사가 청주성을 수복하고

금산싸움에서 순절하기까지의 사적을 기록한 비문으로 1603년에 건립되었다.

 일제시대에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폭파되었던 것을 주민들이 땅속에 묻어 보관했다가

 해방 후 비각을 세우고 보존하고 있다.

종용사는 조헌선생과 영규대사가 이끌던 칠백의사들의 위패와

금산의 눈벌싸움에서 순국한 의병장 고경명, 횡당촌싸움에서 전사한 변응정과

사졸들을 모시고 있는 사당.

또 기념관에는 칠백의병과 관련된 유물 20여점이 전시되고 있는데,

 

조헌 문과급제 교지, 조천일기, 조헌교서, 전통 등 6종 7점은 1989년에 보물 1007호로 지정되었다.

그중 전통은 조헌선생이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면서 금산 싸움에서 순절할 때까지 사용하던 화살통.

재료는 대나무로 길이는 92cm, 지름이 7cm이며 양끝은 동으로 제작되어 있다.

조헌선생이 금산 싸움에서 순절한 후 그의 아우 조범이 거두어 오늘까지 전해온 것인데,

우리 민족에게 21세기의 봄을 선사한 자랑스런 화살통인 셈이다.

 

-칠백의사 순의탑-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적벽강(赤壁江)

전북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뜬봉에서 발원하여

 유유히 북쪽으로 흐르다가 충남에 들어서서 동남쪽에 물굽이를 틀어

서쪽 금산군 부리면 방우리에 들어선다.

 여기서부터 층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산 사이를 뚫고 금강이 흘러

 수통리에 이르르면 그앞의 넓은 시야로 좌측으로 기암을 이루는 절벽이 있으니

 이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을 적벽이라 부르고 그 아래에 흐르는 금강을 “적벽강” 이라 한다.

 

적벽은 바위산이 붉은 색이란 데서 유래된 것으로 30m가 넘는 장엄한 절벽에는

강물아래로 굴이 뚫어져 있으며 이산에는 또한 기화요처가 자리잡고 있어서

 더욱 신기한 산으로 알려져 있으며 가을에는 불 붙는 듯한 단풍이 강물에 투영되어 절경을 이루며

 창파에 저녁노을 질 무렵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적벽절경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겨보는것도 일품이다.

 

적벽아래 흐르는 금강은 마치 호수와 같이 잔잔히 흐르며

 모래사장이 길게 깔려있어 더욱 운치를 돋군다.

일설로는 중국양자강 상류에 있는 천의절경 적벽강과 흡사하다 하여 적벽,

 적벽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봄철에 해가뜨면 춘화가, 여름에는 푸른 소나무잎이 가을에는 단풍이

겨울에는 설화가 강물에 비쳐 비단에 수놓은 푸른물결과 함께 절정을 이루는 적벽강에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 배를 띄워 강물을 헤치는 것도 절경이다 .

요즘 여름철에는 적벽강 모래사장에서 많은 피서객의 피서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금산백령성(기념물 제83호)

남이면 건천리와 역평리 선치산(仙治山)의 동쪽에 있으며,

둘레가 약 200m에 이르는 백제의 테뫼식 산성(山城)이다.

 이곳은 금산군 제원면과 추부면을 통하여 영동/옥천에 이르는 전략상 요충지이다.

 김정호(金正浩)의 『청구도(靑丘圖)』에는 백자령(栢子嶺)으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탄현(炭峴)으로 나와있다.

 

금산군의 외곽성(外廓城)으로 알려져 있으며,

 서쪽을 제외한 동,남,북쪽은 거의 허물어졌다.

서쪽 벽의 남은 상태를 보면 바깥쪽 벽의 높이는 5.8m~6.9m 이고 안쪽 벽은 2.3m~3m이며,

 성벽의 너비는 4m에 이른다. 성내에서는 백제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등이 발견되며,

산봉우리에는 봉수대(烽燧臺)가 있어

진악산(進樂山)의 관앙불봉(觀仰佛峰)의 봉수와 서로 교신하였다.

 특히 견훤(甄萱)이 완산(完山)에 도읍을 정하고 도읍 방어를 위해

이 산성의 아래에 있는 남이면 대양리에 경양현(景陽縣)을 설치하고

백령성을 다시 고쳐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12폭포(12瀑布)

금산군 남이면 구석리에서 동남쪽으로

2㎞ 시냇물 따라 골짜기로 들어가면 무성한 숲과 층암절벽 사이를 누비며

 내려 쏟아지는 크고 작은 12개의 폭포가 있다.

이곳이 유명한 12폭포로 그 이름도 폭포의 수를 따라 지은 것이다.

가장 큰 폭포는 높이가 20m나 되며 물이 맑아서 은하수가 거꾸로 쏟아지는 듯 한

 웅장한 모습과 산골짜기에 울려퍼지는 웅장한 물소리와

옥이 부서지는 물방울은 대자연의 절경이며 조물주의 위대한 창조품이라

가히 말할수 있다.

 

이곳은 옛부터 많은 관광객이 드나들었으며

 바위마다 새겨진 글귀등은 자연풍경과 어울려 그 품위를 더해주고 봄철의 화전놀이,

여름철의 피서, 가을철의 단풍놀이로 찾아드는 이들이 끊일 사이 없으며

 여러 가지 전설이 어우러져 자연의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주위의 지형과 산세로 보아 옛절이 있음직한데 애석하게도 확인할 바 없고,

다만 남쪽 산 밑에 큰 주춧돌이 흩어져 있으나 고증할 길이 없다.

 

 

 육백고지 전승기념탑

모 형 : 난공불락의 요새인 산을 상징하는 양쪽 구조물을 웅장하게 세우고

 중앙에 영원히 펄럭이는 승리의 깃발을 당당하게 배치하여

두 산과 한 개의 깃발 탑신은 하나로 커다란 조화를 이루어

 민ㆍ경ㆍ군이 삼위일체가 되어 역사적 위업을 이루었다는 뜻을

전체적 조형물로 표현하였으며 세 개의 탑신을 통한 통일감과

중앙탑신의 세 차례 굴곡은 변화와 고도의 긴장감을 형성하고 있음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건립개요 : 6. 25직후 5년간 공비토벌 작전으로

 민ㆍ경ㆍ군의 호국용사들이 피흘리며 격전을 벌인 육백고지 기슭에 장렬히 전사한

 민ㆍ경ㆍ군에 대한 영령을 추모하고 이 전투에 참여하여

 고귀한 승리의 위업을 세운 군민의 향토방위 정신고취와 반공정신의

 산 교육장으로 삼고자 전승탑과 충혼비를 건립함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전 과 : 사살 187명, 생포 118명으로 금산치안확보,

무기노획(기관총 2정, 따발총 11정, 자동소총 25정)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피 해 : 전사자 270명(순국지사 33, 일반인 50, 경찰 168, 군인 19)

 

 금산향교(기념물 제121호)

향교는 조선시대의 관립교육기관이자

선현(先賢)을 향사(享祀)하는 곳으로, 고을마다 건립되었다.

금산향교는 원래 조선 초기에 금산읍 하옥리 백학동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이후 다시 세워진 것으로 전한다.

1684년(숙종 10년)에 향교를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짓고 그후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다.

 

대성전(大成殿)에는 공자(孔子)를 중심으로 중국의 선철(先哲)을,

 동무와 서무에는 우리나라의 18현(賢)의 위패를 모시고 봄과 가을로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배향된 인물의 배향 순서는 시대에 따라 바뀌어 왔다.

 명륜당(明倫堂)은 유생들이 공부하는 강의실이고, 동재(東齋)와 서재(書齋)는 유생들의 숙소였다.

그밖에 동재각(東齋閣)과 서재각(書齋閣), 외삼문(外三門),

내삼문(內三門) 등이 남아있다.

 

 금산 이치대첩지(梨峙大捷址)

임진왜란 최초의 육전승전지인 이치대첩지(梨峙大捷址·충남도지정 문화재 기념물 제154호)

이치대첩(梨峙大捷)은 대둔산 중허리를 넘어

전북 완주군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상 중요한 곳이다.

임진년 7월 경상도와 충청도를 휩쓴 왜적이 군량미의 현지보급을 꾀하여 이 배티재를 넘어

 호남평야로 진출하려고 적장 고바야가와가 거느린 2만 병력을 이끌고

 이 재를 넘으려 했다.

이보다 앞서 권율(權慄) 장군은 동복현감 황진과 1,500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재를 지켜

 왜적의 호남진출을 막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왜적은 수의 우세함과 승승장구한 힘을 믿고 단숨에 이 재를 넘으려고 덤벼드는 것을

 장군은 전 병력을 독려하여 결사전을 벌려서 적을 섬멸하여 대첩을 올리니

 왜적이 다시는 호남에 진출할 엄두도 못내게 되었다.

이치대첩은 행주대첩, 진주대첩보다 앞서는 임진왜란 최초의 육전승전지로

국가사적지로 지정 추진중이며 그에 앞서 도기념물 154호로 지정,

성역화 사업을 통하여 새롭게 단장할 전망이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고경명 선생비(高敬命 先生碑)

고경명 (1533-1592)

고경명 선생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이 함락되고 왕이 의주로 피신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고향인 장흥에서 6천여 명의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황간, 영동 등지에 있던 왜적이 금산을 점령하고 장차 전주를 지나

 호남지역을 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여 충청의병장으로 있던 조헌에게 서신을 보내어

같이 형강을 건너 금산의 왜적을 칠 것을 제의하였다.

 

진산에 이르렀을 때 전주로 진군하던 왜병을 만나 용맹하게 싸우니

 불리함을 깨달은 적은 서서히 후퇴하여 금산성으로 돌아갔다.

금산에 도착하여서는 방어사 곽영의 군과 합세하여 왜적을 공격하였으나,

눈벌에서 왜적에 포위되어 모든 군사와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을 애통히 여긴 선조는 광주 표충사·금산의 중용사 등에

그의 사당을 모시게 하여, 충절을 기리도록 하였다.

 

임진왜란 때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 선생이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우다가 순절한 사실을 새긴 비다.

선생은 1558년(명종 13년)에 문과에 장원한 후

중요한 직책을 두루 거쳐 동래부사에 이르렀는데,

서인(西人)이 몰락할 때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光州)에서 모집한 의병 6천여 명을 이끌고

 1592년 7월 10일에 금산으로 침입한 일본군과 싸우다 눈벌(臥隱坪)에서 전사하였다.

 

 효종때 금산군수 여필관(呂必寬)이 비문을 지어

선생이 전사한 곳의 건너편 산기슭에 순절비(殉節碑)를 세웠으나,

1940년 일본경찰의 만행으로 비가 파괴되었다.

비석의 파편을 한식(韓式) 비각(碑閣) 안에 정리하였고,

1952년 후손들이 여필관의 비문을 다시 새겨 복원하였다.

 현재 1962년에 세워진 석조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금산인삼축제

우리나라에서 인삼축제를 개최한 것은

일제시 인삼재배지로 유명하였던 개성시에서 서부공원에 인삼신사를 건립하고

 매년 10月 상달 길일을 택하여 삼업계 원로가 제주가 되어 제사를 올리고

 제등시가행렬과 밤중의 폭죽행사들 거시적인 인삼제전을 거행한 바 있었다.

 

 

그리고 이곳 금산지방에서도

 개성과 같은 공개적인 행사는 아니지만 인삼경작인 개인별로 삼장제라 하여

 인삼포를 완성하고 인삼의 새싹이 돋아오를 때면 인삼을

이 고장에 재배토록 하여준 산신령에게 감사드리고

인삼밭의 피해를 막아 인삼농사가 풍성하게 되기를

기원하는 제사가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왔다.

 

 

따라서 금산군에서는 이와 같은 삼장제를 현대적인 조화로

 전승 군민 축제로 발전시키며 인삼 주산지로서 인삼의 본질과 효능을 규명하여

 널리 선양하고 인삼 활용 방안의 적극적인 모색으로 소비를 창출,

군민 소득증대를 기함은 물론 이 고장 전통문화 행사를 정립시키기 위하여

 조례를 제정, 관내 유관기관 및 각계인사를 망라한 금산군 인삼선양위원회가 주관이 되어

 1981년 10월1일 ~ 2일까지(2일간) 제1회 금산인삼제를 개최하여

 오늘까지 이르고 있다.

 

금산인삼축제는 금산인삼을 널리 선양하고,

 금산이 인삼의 종주로서의 면모를 일신하였으며,

전국 최고의 산업형문화관광축제로 자리잡게 되었다.

 

 

 

출처 : 사오십대 쉼터
글쓴이 : 영변약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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