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조상들의 ‘속담’에서 작가로서의 열등감을 느낀다고 했다. 슬픔도 유머로 승화
시키는 한 줄의 해학은 아무나 쓸 수 없다는 것. 어쩌면 그가 트위터에서 보여주는 글은
이를 닮으려는 노력일지도 모른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사주를 따져보지 않아도 작가 이외수(66)의 말년운은 필시 드라마틱하게 좋을 터다.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손에서 자랐던 유년 시절과 노숙자나 다름없이
궁핍했던 20대를 보상받기나 하는 것처럼. 40만~50만 명의 고정독자를 확보한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사실은 접어두자.
이제 그는 책보다 더 넓은 세상인 트위터에서 140만 명의 ‘추종자’를 만들었다.
7년 전 이사 온 강원도 화천 집은 그들의 성지순례지가 된 지 오래다. 하나 더.
지난달 12일엔 집 바로 옆에 ‘이외수문학관’까지 문을 열었다. 대체 사람을 끌어들이는
그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지난달 23일 그를 찾았다.
현역 작가로는 처음 문학관 열어
1992년 『벽오금학도』를 쓸 때 방 입구에 설치했던 교도소 철문. 현재는 문학관
내부에 세워져 있다. 작가는 “당시엔 글쓰기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했다”고
회상했다. 철문의 문구는 『하악하악』의 한 구절로, ‘이외수체’라는 그의 독특한
필체로 씌어졌다.
이외수문학관엔 이외수가 있다. 당연한 말이 아니다. 그곳은 국내에선 유일한 현역 작가의 문학관이다.
관내엔 소설집 『벽오금학도』(1992)·『황금비늘』(1997)부터 산문집 『외뿔』
(2001)·『하악하악』(2008)까지 그가 쓴 전권의 1판 1쇄 100권(개정판 포함)이
고스란히 보관돼 있다. 이 밖에도 습작 원고와 직접 그린 그림, 원고 쓸 때 사용한
컴퓨터 등을 접할 수 있다.
문학관 내에 흐르는 음악도 그가 직접 컴퓨터로 작곡했단다.
기자가 문학관을 찾았을 땐 광주광역시에서 온 대학생 두 명이 작가와 막 인사를 나누던
참이었다. 그는 방문객들에게 전시를 설명하고, 가져온 책에 사인을 해주고,
사진도 함께 찍었다. 청년들의 얼굴이 한껏 상기돼 보였다.
●하루에 몇 명이나 찾아오나.
“휴가철이 끝나 지금은 많이 줄었다. 한 50~60명쯤? 한여름엔 하루에 200명씩 왔다.
강원도 피서객들이 한번씩 들러가는 코스로 삼은 것 같다.”
●매일 여기에 나와 있나.
“당분간 그래야 하지 않겠나. 못 해먹을 짓이긴 하다. 오전 6시쯤 잠들어 11시쯤
일어나는 ‘주침야활’이다가 갑자기 아침형 인간이 됐으니. 30년 넘은 생활 패턴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처음엔 오전 10시부터 나왔는데 휴가철이 끝나고는
낮 12시부터 오후 6시까지로 근무시간을 줄였다.(웃음)”
●그래도 방문객들이 많아 뿌듯할 것 같다.
“‘뵙고 싶었습니다’라는 말을 참 많이 해주신다. 격려가 된다. 여긴 사자(死者)의
문학관이 아니라 생자의 문학관이라 좋다. 저자가 독자의 어떤 질문에 대해서도
말해줄 수 있으니 궁금증이 남을 리 없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늘 새로울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여·야 대선 후보들 차례로 찾아와
아내 전영자씨가 보관해 온 남편의 습작 원고.
이외수문학관에는 대선 주자들도 잇따라 찾아왔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지난달
14일 작가를 찾아 자신의 책을 주고 갔다. 손학규 후보 역시 문학관 개관식에 참석했다.
김두관 후보는 지난달 20일 새벽 강원도 화천에 있는 이씨의 집에 들렀다.
●야권 후보들만 오나 보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특보도 얼마 전 다녀갔다. 언뜻 보기엔 내가 야당 편향성을
가진 것 같지만 집권 여당은 권한도, 한 일도 많으니 당연히 욕할 게 더 많은 것뿐이다.”
●후보들이 오면 무슨 얘기를 하나.
“여야 후보 모두 세상이 맑아지길 바라고, 나라 잘되기 바라는 게 진심으로 느껴졌다.
내 입장에선 기왕 만난 김에 불만도 얘기했다. 지금껏 여야를 막론하고 역대 대통령
공약에 문화예술 관련 공약을 앞세운 사람이 없지 않나. 우리도 이젠 그래야 할 때도
됐다고 했다. 만날 경제 살린다는 말은 지겹지도 않나.”
●누가 가장 고개를 끄덕이던가.
“내 앞에선 다 잘 끄덕였다.(웃음)”
●잘 보이려 한 것 같다.
“그것보다는 공통분모, 140만 팔로어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찾고 싶은
거겠지. 140만이란 숫자 정도면 보편성이 있는 거니까.
내가 주장하는 보편성이나 공통분모를 자기한테 창출시키려는 거다.”
●그럼 한 수 가르쳐 줬나.
“가르친다는 건 어폐고, 의논해 봤다. 우리나라가 뭐가 문제인지 모색하고 진단해
보고. 그들 모두 공감하는 건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기본부터 다지는 교육으로 말이다. 가령 청소년이 카톡방에서 왕따를 당해 자살했으니
스마트폰 사용’을 금하자는 식으로 해결하면 안 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왜 그것이
잘못된 행동인지 가르치는 인터넷 인성수업이 교육과정에 들어가야 한다.”
●지난 총선 때는 지지 후보(새누리당 한기호)를 밝혔다가 욕도 많이 먹었다.
대선 후보에 대해선.
“여야의 후보가 확실해지면 행보를 보고 누가 대통령 감인지 결정할 것이다.
트위터에 지지 후보도 밝힐 생각이다. 한 방을 준비하고 있다.(웃음)”
●선택 기준이 뭔가.
“국민에 대한 사랑. 정치적 역량보다 마음이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나.
“많이 베풀면서 살았나, 챙기면서 살았나 보면 된다. 그리고 또 실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느냐 하는 것이다. 과거 행적과 앞으로의 기반 모두가 중요하다.”
●악플이 만만찮을 텐데.
“내가 그 (인터넷) 바닥에서 십수 년을 살아왔는데, 온갖 악플러를 다 상대해 봤다.
나는 내 소신이 옳다고 생각하니까 굽히지 않는다.”
●안철수 교수에 대해선 언급이 없는데.
“그 분은 말이 없다.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 없고. 책은 봤는데 바른 소리만 했다.
그것만 가지고는 알 수 없지. 실천이 문제다.”
젊은 세대에 희망 주는 ‘존버’ 정신
그의 팔로어 수는 비연예인 중에선 가장 많다. ‘트위터의 대통령’이란 말도 그래서다.
관리도 철저하다. 하루 5~10여 개의 트윗을 올린다. 그는 ‘기인’처럼 보이는 외모와
달리 IT에 일찌감치 능했다.
처음 컴퓨터를 접한 건 1997년. 이전까진 엎드려 글을 쓰다 보니 눈과 허리가 나빠졌던
탓이다. 하지만 독수리 타법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보다 못한 아들이 ‘천리안’과 ‘유니텔’ 등 PC통신에서 채팅을 해보라고 권했다.
첫날부터 에피소드가 생겼다. 혼자 있는 대화방에 네티즌 한 명이 불쑥 찾아왔다.
“안녕, 외수야.” 그는 거리낌없이 얼른 맞장구를 쳤다. “응? 안녕.” 상대가 다시 물었다.
“난 중학생이야. 넌 몇 살이니?” “응, 난 52세.” “억!” 10대는 놀라 달아났다.
하지만 이제 그가 아들뻘·손자뻘 되는 젊은이들과 대화하는 건 자연스럽다.
60대 노인의 ‘훈시’가 아니라 위트와 유머가 담긴 직설적 화법을 구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는 말들을 자주 올린다. 트윗에서 자주 쓰는
‘존버(존나게 버티자)’라는 말도 그런 맥락이다.
●‘노인돌’이라 불릴 만큼 인기가 높다. 부담은 없나.
“그들이 나랑 소통하며 스트레스도 풀고 좀 즐거웠으면 좋겠다. 요새 젊은이들은 참
불안정하다. 의기소침해 있고, 불평불만만 가득하고, 갈피를 못 잡고 있다.
나라도 조언자가 돼줘야 하겠다는 생각이다. 어른이 없는 시대라지만,
애들이 다 삭은 노인이 됐는데 어른이 뭐 필요 있나.”
●이 시대 젊은이들의 큰 고민이 뭔가.
“딱 하나다. ‘저는 취미도, 특기도, 소질도, 의욕도 없습니다. 저 뭐해야 하죠?’
이거다. 자기 인생을 놓고 뭐해야 하죠, 이러면 참 암울한 인생이다. 나는 이런
말을 해준다.
왜 20대에 출세를 하려고 하냐고. 20대에 성공하는 건 정상이 아니다.
역량을 연마할 때다. 부모들도 20대에 성공하라고 재촉하지 말아야 한다.
어차피 학교를 졸업하고 3~5년은 정해진 게 없어야 정상이다. 인생을 어디에 제대로
바치고 살 건지만 정해도 다행 아닌가. 너무 정답만 찾으려 하는 게 문제다.
수능이 얼마 안 남아선지 고등학생들은 만날 시험에 자신이 없다, 망칠 것 같다,
이런 푸념만 한다. 누구나 같은 처지다. 그렇다면 자신감을 먼저 가진 사람이 따고
들어가는 건데 말이다.”
●‘존버 정신’이 그런 건가.
“같은 말이라도 젊은이들에게 ‘너희네 심정 이해한다. 근데 참아라’ 그러면 얼마나
짜증나겠나. 차라리 걔네 식으로 ‘존나게 버텨’ 이게 훨씬 낫다. 욕 하면서라도 버티면
되는 거다.”
●정말 버티면 좋은 날이 오나.
“나도 젊었을 땐 열등감투성이였다. 청춘이 괴로워서 손목도 그어보고 그랬다.
내가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한 개만이라도 잘해 보자,
그리고 여기까지 온 거다. 내가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다면 굶주림과 불면에 강한
것이었다.”
한때 화가 지망생이었던 그는 1972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견습 어린이들’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발을 들였다. 이후 신문기자와 학원강사를 하며 글을 쓰다 79년부터는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 시대 문인들이 그렇듯 그의 삶도 한없이 팍팍했다.
사회 밑바닥에 깔린 칙칙한 습기를 빨아들인 채 허름한 술집을 전전하는 게 일과였다.
겨울엔 너무 추워 길거리의 죽은 개를 방 안에 데려와 안고 잔 적도 있다고 했다.
그가 소설가 김성동씨와 여인숙에 함께 묵었을 때의 일화는 지금도 두고두고 회자된다.
작가의 두 발이 덧버선을 신은 모양으로 시커멓게 때가 끼어 있어 주인이 놀랐다는
얘기다.
●결국 버텼다는 경험이 젊은층에게 먹히는 건가.
“그렇다. 그리고 내 진정성을 아는 거다. 난 초딩이든 누구든 다 진지하게 답해 준다.
초등학교 3학년생의 멘션 중에 이런 게 있었다. ‘인생에 대해 많은 조언 부탁드립니다’
라고. 그래도 난 진심으로 얘기해 준다. 누구는 엄마 생일인데 좋은 메시지 보내달라고
하고, 누구는 시험 잘 보게 한마디만 해달라고 하고. 그럼 정말 마음을 담아 답해 준다.”
●하루에 받는 멘션 수가 어마어마하겠다.
“한 시간 동안 타임라인에 1000여 개가 쭉 뜬다. 그걸 거의 다 체크하고, 내 말이
필요한 것이면 다 해준다. 그러니 날 안 좋아하겠나.”
●트위터만 해도 시간이 다 가겠다.
“답변이야 그렇다치고 내가 올리는 글은 더 오래 걸린다. 문학적인 표현이 있으면 한
시간도 넘게 쓴다. 같은 내용을 일곱 번 고쳐 올리기도 하고. 그래서 똑같은 트윗 계속
올렸다고 언팔도 당하고.(웃음)”
실제 그는 작품을 오래 쓴다. 소설 『벽오금학도』는 5년이 걸렸다. 그래서 작가 생활
30년 동안 소설집이 10권도 안 된다.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는 ‘묘사적 문체’를
만들어내려 하는 탓이다. 지난 12월에 내놓은 산문집 『절대강자』도 단문 모음이지만
비유마다 고심한 흔적이 오롯하다.
●트윗 글과 비슷하다.
“맞다. 이제는 트위터가 글쓰기의 기초공사다. 습작 공간이자 정보 공간이고 소통
공간이다.”
●다음엔 어떤 책을 쓰고 싶나.
“불행한 시대를 사는 인간 전체를 끌어안는 글로 확장하고 싶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물 위를 걷는 사람 얘기다. 그래서 요트도 장만했다. 물 가운데로 들어가 시각적으로
물에서 바깥을 봐야 하니까. 요트협회에서 이상한 용도로 요트 쓰는 사람이
나타났다면서 1억원대짜리로 구해 줬다. 화천강에서 춘천강까지가 배경이라 이미 세
번 왕복해 봤다. 아직은 구상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중이다.”
묘비명은 ‘걸판지게 살다 간다’
여기서 인터뷰가 잠시 중단됐다. 부인 전영자(59)씨가 들어와 ‘언제 끝날 것 같냐’며
눈치를 줬다. 그 사이 문학관 손님 30여 명이 되돌아갔다고 했다. 작가가 “당신이 대신
사인해 줘”라길래 농담인 줄 알았는데, 실제 방문객 중엔 전씨를 보러 오는 이도 꽤
있단다. 미스 강원 출신인 아내는 37년간 남편이 글쓰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운
조력자다. 전씨는 지금도 작가의 머리를 감겨 주고, 옷을 입혀 주고, 얼굴에 로션을
발라준다고 했다. 집안의 대소사, 남편의 스케줄 관리, 손님들 식사 준비도
그의 몫이다. 문학관에 있는 모든 과거의 흔적 역시 지금껏 아내 혼자 챙겨온
기록물이었다.
그는 아내를 제3자에게는 ‘사모님’이라고 불렀다.
●두 분은 어떻게 만났나.
“1975년 음악다방에서 DJ를 했다. 사모님이 손님으로 왔는데 내 의자에 앉더라.
다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니까 주인이 다른 의자랑 붙여서 자라고 특별히
사다 준 거였다. 그런데 사모님이 다방에 의자 주인이 어디 있느냐고 따지더라.”
●싸우다 정 들었나.
“사모님 친구가 와서 말씨름은 멈춘 뒤 내가 한마디 했다. ‘당신 예쁘니 자주 출몰해
주십시오. 제가 유혹해 보겠습니다’라고. 그러면서 날 틀림없이 좋아하게 될 테니
이왕이면 미리 좋아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사모님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나중에 들으니
사모님은 그때 ‘거지 같은 놈’이 만진 어깨를 도려내고 싶었다더라. 어떻게 복수해
줄까 하다가 내가 가난하다는 점을 건드릴 작전을 짰다. 저녁을 거하게 사달라고 한거다.
그런데 난 가락국숫집 데려가서 외상 긋고 사줬다. 그 다음엔 당시 다섯 살이던 처남을
아들이라고 속이고 영화 좀 보여달라고 그러더라. 난 알았다 하고는 예전에 다녔던
강원일보 문화부 후배들을 시켜 표를 구해놨다. 사모님이 나중엔 화가 치밀어 오르다
어느날 ‘이 사람 정말 이상하다’고 느꼈단다. 다른 남자들은 없어도 있는 척하는데 이
사람은 그냥 다 드러내니. 그게 갑자기 좋아 보이더라고. 석 달 만에 말이다.
결국 진심은 통한다, 하하.”
●진심, 아까 말한 진정성과 같은 얘긴가.
“보통 결혼하고 애 낳고 늙어가며 타협하는 게 많아진다. 하지만 나는 차라리 며칠
굶더라도 흔들린 적이 없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니까. 무엇이 옳은지 정답은 나와 있고,
그냥 따르면 그뿐이다. 4년 전 담배 끊을 때도 그랬다. 가족에게 약속한 뒤 금단
현상으로 수술을 받을 지경까지 갔지만 끝내 안 피웠다. 자꾸 구실을 만드는 건
머리에서 나오지 않나. 가슴을 따르면 된다.”
그는 스스로를 두고 “참 멋진 인생을 산 것 같다”고 했다. 어릴 적 동냥밥을 얻어먹고,
마흔셋까지 배 곯고 지냈는데 그래도 유혹에 빠지지 않고 자유롭게 지냈다는 걸 뿌듯해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를 알아봐 주는 거지. 게다가 천덕꾸러기가 됐을 이
나이까지 오라는 데도 많고, 움직이면 돈도 생기니, 끝내주는 인생 아니겠어.”
그는 20대로 돌아가면 뭘 하겠느냐는 질문에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며 껄껄 웃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중광 스님은 묘비명에 ‘괜히 왔다 간다’고 썼지만 난 반대다. 내 묘비명은 ‘걸판지게
살다 간다’다.” 12년 9월 1일
중앙일보 화천= 이도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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